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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는 뛰어난 재능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by 풀무원세종 2023.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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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신동 모차르트는 뛰어난 재능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모차르트는 뛰어난 재능으로 인류 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바로크 시대의 대위법 대신 화성음악을 중시 하고 소나타 형식을 발전시켜 고전주의의 문을 열고, 주옥 같은 오페라 작품들을 귾임없이 쏟아내는 등 그가 남긴 업적을 헤아리려면 밤을 새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런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모차르트의 영혼은 무척 어린애 같아서 자기중심적이고, 제멋대로인데다 변덕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 때문에 모차르트는 간혹 욕을 얻어먹기도 했지요.

모차르트
1782년경 모차르트와 의형제를 맺은 요제프 랑게가 그리다만 미완성 초상화로 1782년부터 1783년 사이의 겨울에 그려졌습니다.

모차르트는 서른다섯 해의 짧은 시간 동안 이 세상에 살다간 모차르트는 훌륭한 인품을 가진 성인은 아니었지만 남에게 해를 끼친적은 없고 그시대 사람들은 그를 `하늘에서 잠시 쫓겨난 음악 천사` 라고 불러 왔습니다. 하늘에서 말썽을 피우다가 인간 세상으로 쫓겨나와 천상에서나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음악을 남겨 놓고 돌아간 천사라는 것이지요. 인류가 만든 음악중에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실현했다는 고전파 음악을 그가 발전시킨 것입니다.

 

1. 모차르트를 사람들은 음악의 신동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음악의 신동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신동 정도가 아니고 굉장한 천재였습니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추정해 낸 아이큐가 230~250이라니 음악사는 물론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할 수 있어요. 인류 최고의 천재답게 그의 행적에는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줄을 이었습니다. 다섯 살 때 작곡을 시작해서 여덟 살 때 교향곡 제1번을, 열한 살때 오페라(바스티안과 바스티엔)을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열네 살 때는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하다가 11분짜리 곡을 단 한 번 듣고, 정확히 기억해서 악보를 적어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곡은 바로 알레그리가 작곡한 합창곡(미제레레)였습니다. 원래는 성당 밖으로 절대로 갖고 나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극비곡이었지만, 교황은 모차르트에게 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놀라운 재능에 감탄했기 때문이었지요. 초능력에 가까운 그의 천재성은 이 세상에 머문 35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한 곡을 만들기까지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야 했던 여느 음악가들과 달리 모차르트에게는 작품을 쓰며 수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마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음악을 그대로 옮겨 쓰듯 거침없이 써내려갔으므로, 그의 악보는 언제나 깨끗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악보를 써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놀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머리속에서 완성된 스코어를 그저 오선지에 옮기고 있을 뿐이오" 이 밖에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일화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처럼 당구를 치면서 작곡을 하는 일은 예사였고, 한 곡을 악보에 써내려가면서 동시에 다른 곡을 구상하는 일도 가능했다니, 어쩌면 그는 단순한 천재가 아니라 사람들의 말대로 정말 `하늘에서 쫓겨난 음악 천사` 가 아니었을까요?

 

2. 궁정 음악가의 아버지에게서 늘 음악을 듣고 자란 모차르트는 엄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두 아이에게 늘 음악을 들려주는 한편, 다양한 방법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엄격한 교욱을 시켰습니다. 어릴 때부터 누나가 연주하는 하프시코드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볼프강은 이미 여섯살 때 뛰어난 하프시코드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오르간이든 바이올린이든 가르쳐 주기만 하면 금방 연주하고, 글을 읽기도 전에 협주곡을 작곡하는 아들은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재능을 계발도 하고 자랑도 할 겸 볼프강과 난넬을 데리고 유럽 연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볼프강의 나이 여섯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뮌헨을 거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도착한 모차르트 일행은 열렬한 환영을 받고, 당시의 여제였던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연주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때 벌어진 일화 하나! 볼프강이 실수로 넘어지자 비슷한 또래의 한 소녀가 와서 볼프강을 일으켜 준 일이 있었습니다. 볼프강은 그 소녀에게 "고마워요, 내가 크면 당신과 결혼하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녀가 누구냐고요? 바로 훗날 프랑스의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 공주였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0퍼센트였겠지만, 만일 볼프강의 말대로 두 사람이 결혼했다면 마리앙투아네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적어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극을 겪지는 않았겠지요? 첫 번째 연주 여행에서 성공을 거둔 모차르트 일가는 이후에도 계속 유럽 전역을 여행하였습니다. 이 여행을 통해 볼프강은 여러 나라의 음악가들과 만났고,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에, 독일에서는 교향곡에 심취하는 한편, 틈틈이 작곡도 공부하여 여덟 살 때 첫 교향곡을, 열한 살 때 첫 오페라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15세 이전에 소나타, 교향곡, 오페라까지 무려 1백 곡 이상의 곡을 쓰면서 연주를 잘하는 꼬마 천재에서 위대한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3. 철없는 어린애같은 모차르트는 학교를 다니지 않아 사회성은 부족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차르트는 음악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인품은 그다지 훌륭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아마데우스)를 보면 모차르트는 술주정뱅이에 여자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망나니로 그려져 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못생긴 외모와 작은 키 때문에 열등감을 갖는가 하면, 주위 사람들과도 그다지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두뇌가 좋은 만큼 사회성까지 좋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천재 특유의 고집과 괴팍한 성격 때문에 모차르트에게는 유달리 적이 많이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너무 어린 나이에 음악 천재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겼다고도 합니다. 여느 아이들처럼 또래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면서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 필요한 예절이나 상식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음악적으로는 뛰어났지만 그 밖의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능력 따위에서는 많은 결점이 드러났으니까요.

 

4. 자유를 갈망한 모차르트는 한 군데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어느 한 군데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않았습니다. 잘츠부르크 궁정음악단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잠시 일하기도 했지만 그는 곧 그곳을 나와서 독립된 음악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모차르트가 여느 음악가들처럼 궁정이나 귀족 밑에서일하지 않은 것은 음악가들을 하인처럼 다루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온화한 하이든과 달리 모차르트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자존심이 매우 강했던 것입니다. 또 유럽 사회의 변화도 음악가의 독립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어른이 될 무렵, 즉 18세기 후반의 유럽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폭풍과도 같은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은 왕과 귀족의 힘을 약하게 만드는 대신 중산층 시민의 힘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이미 상업으로 많은 돈을 번 중산층 시민들이 공장을 세워 더 많은 돈을 벌어들임으로써 왕과 귀족들보다 더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경제력을 갖게 된 시민들은 왕과 귀족에게 무조건 복종하던 과거의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평등사상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음악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쳣습니다. 더 이상 왕과 귀족의 밑에서 하인 대우를 받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경제적인 독립을 통해 예술가로서 자존심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이든은 마지막 궁정 음악가였고, 모차르트는 고용된 신분에서 독립적인 음악가로 가는 과도기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보다 14년 뒤에 태어난 베토벤 시대부터는 음악가들이 왕이나 귀족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되었습니다.

 

5.  35세의 나이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

 

왕과 귀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예술가로서 자유를 찾는 길이라는 것은 틀림없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음악가들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고정적인 수입을 잃는 바람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것은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빈으로 간 모차르트는 오페라(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등을 발표 하여 대성공을 거두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얼마 못 가 모두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모차르트 자신이 워낙 경제 감각이 없는데다가 아내 콘스탄체마저 낭비가 심했으므로 모차르트는 곧 빚더미에 앉게 되엇습니다. 게다가 아내와의 결혼 때문에 인연마저 끊었던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자 모차르트는 상심에 젖은 나머지 건강이 급속히 나빠졋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모차르트는 계속 음악을 놓지 않았습니다.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교향곡 39, 40, 41번도 이 시기에 작곡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해에도 그는 오페라(마술피리)를 작곡했고, 눈을 감기 직전까지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곡(레퀴엠)을 작곡하였습니다. 1791년, 모차르트는 35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인류 최고의 천재 음악가가 가는 마지막 길은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했습니다. 장례를 치를 돈조차 없을 만큼 가난했던 탓에 모차르트의 주검은 묘비 하나 없이 거의 버려지다시피 쓸쓸하게 묻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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